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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뒤늦게 만들어진 배신 아이콘, 신숙주

by Spacewizard 2023.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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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3일 경기도가 의정부 부용산 일대를 숲체험 관광명소로 조성한다고 밝혔는데, 이 부용길에는 시인 천상병의 작품 「귀천」의 소풍길과 조선초기 대신 신숙주의 묘를 만나볼 수 있다고 한다. 오늘날 신숙주에 대한 평가는 배신자의 대명자로 인색하기 그지 없지만, 그는 여러 방면으로 뛰어난 재능이 있었으며 그 만큼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여기서는 신숙주에 대해 알 수 있는 몇 가지 내용에 대해서 알아보자. 보통 신숙주와 떼어 놓을 수 없는 인물로 성삼문이 거론되는바, 비교적 차원에서 성삼문에 관한 내용도 본문에서 짧게 덧붙인다.

 

인재 선발의 기반, 과거

 

중국 수나라에 처음으로 시행된 과거제도는 고려시대 들어 한반도에 도입되었다. 조선시대 양반들이 과거에 매달린 이유로는 관료로서의 출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양반이라는 기득권 지위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3대에 걸쳐 과거(소과 포함) 합격경력이 없으면 양반자격을 박탈하였는데, 이를 삼대무현관(三代無顯官)이라고 한다. 양반가 자제들은 가문의 영광을 위해 어린 시절부터 과거를 위한 교육을 받았는데, 서당에서 시작하여 중등교육기관인 지방 향교(서울은 사부학당)에 들어가 소과를 준비하였다. 이전 글 <조선 2인자의 픽, 정도전 집터>에서는 정도전 집터 사당자리에 중학을 설립되었음을 언급했었고, 사부학당의 당시 위치를 표시했었다. 성균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소과 합격이 필요했다.

 

소과는 진사시(시문)·생원시(사서경)로 구분하여 초시·복시를 거쳐 각각 100명씩 총 200명을 선발했다. 소과 합격자는 성균관 입학자격을 갖추었고, 문과 대과에 응시할 기회가 주어졌다. 대과는 다음과 같이 3차례의 시험을 치렀다. 

 

초시 : 240명 선발

복시 : 33명 선발

전시 : 성적순 등급(갑과 3명, 을과 7명, 병과 23명)

 

참고로 과거의 최종급제자를 33명으로 정한 이유는 고려의 숭불사상에서 유래되었는데, 불교의 우주론에서 수미상 정상에는 위치한 도리천(삼십삼천)에 33개의 성이 있다고 한다. 전시성적에 따라 임관품계가 갈렸는데, 장원(종6품)·갑과(정7품)·을과(정8품)·병과(정9품)이었다. 같은 갑과라도 1등과 나머지 2명 간에 품계차를 두었고, 장원·병과 간에는 5계급이나 차이가 났다. 조선조정에서 1단계 승진에 소요되는 기간이 약 3년이었다고 하니, 여간 큰 격차가 아니었다. 이러한 연유로 병과로 급제한 관리는 고위관직에 오르기 위해 과거에 재도전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요즘같이 민주화된 사회에서도 일부 권력층의 입시비리는 심심찮게 등장하는데, 현대인의 시각에서 바라봤을 때 조선의 과거시험은 불공정의 극치를 보여주는 면들도 있다. 일단 조선 중기까지 응시자의 친척·친구들이 함께 시험장에 들어가 공동으로 답안을 작성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일종의 '지식품앗이'로 한 사람씩 합격을 밀어주는 것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대리시험 전문가들이 등장하면서 함께 시험장에 들어갔다고 한다. 소과에서 장원이 되기 위해서는 가문의 후광이 필요했는데, 장원을 선정할 때는 집안을 확인했기 때이다. 장원의 시험관은 물론 급제자들도 수긍할 만한 집안 사람이어야 했던 것이다. 심지어 생원시 3등과 진사시 6등은 불운이 따른다고 하여, 고의로 서자나 중인에게 그 등수를 부여하기도 하였다. 이를 '생삼진육'이라고 한다.

단원 김홍도의 '공원춘효도' [출처:안산시]

신숙주가 태어난 외가, 호남 명촌

 

조선시대 선비들은 어려서는 외가 덕을 보고 장가 가서는 처가을 보았는데, 이러한 관습은 장인집에서 혼인생활을 시작했던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왔다. 조선시대에는 다음의 3개 마을을 「호남 3대 명촌」이라 불렀다.

 

영암 구림마을

정읍 무성마을

나주 금안마을

 

신숙주(1417~1475)는 나주 금안마을의 외가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고, 신숙주보다 한 살 어린 성삼문(1418~1456)은 홍주(현 홍성)의 외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율곡 이이는 강릉의 외가(오죽헌)에서 태어났고, 처가인 파주에서 오래 살았다. 조선의 선비들은 자식이 다 자란 뒤에야 식구들을 제 집으로 데려올 수 있었는데, 신숙주는 관직은 얻은 아버지를 따라 7살 전후로 상경했다고 한다.


세종의 총애를 받은, 신숙주 가문

 

식년시(式年試)는 정기(3년)적으로 시행하는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과거시험이었다. 반면 왕이 친히 시험관이 되어 실시하는 친시(親試)는 비정기적으로 시행되었으며 정해진 급제자수도 없었다. 중시(重試)는 정기(10년)적으로 시행하는 당하관(堂下官) 이하의 승진시험으로, 당하관 이하 문무관 내지 아직 관직이 없는 문무관 합격자가 응시할 수 있었다. 중시 합격자는 최소 1계급에서 장원은 4계급까지 특진되었다.

 

1435년 17세의 성상문은 식년시 생원시를 합격하고, 3년 후인 1438년 식년시 문과에서 33명 중 29등으로 급제했다. 1438년 21세의 신숙주는 식년시 진사시를 장원으로 합격하고, 이듬해 1439년 친시 문과에서는 급제자 10명 중 3등으로 급제하였다. 성삼문이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에 문과 급제를 이뤘지만, 신숙주는 연년으로 소과·대과에 급제하는 재능을 보였다. 오늘날과 달리 본인능력이 어느 정도만 받쳐주면 아버지·가문의 덕을 충분히 볼 수 있었던 시대였던지라, 신숙주에게는 세종이 총애한 「대제학 신장 아들」이라는 타이틀도 따라 다녔다고 한다.

 

관직생활 중에 세종의 인정을 받은, 성삼문

 

신숙주는 집현전에 근무를 하면서 엄청난 독서력을 보였다. 장서각에서 밤새 독서를 즐기기 위해 남들이 기피하는 숙직을 대신하는가 하면, 한번은 늦은 밤까지 궁궐에서 책을 읽다가 잠든 모습을 보고 세종이 어의를 덮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탁월한 언어적 재능을 가졌던 신숙주는 중국어·일본어·몽골어 등 동아시아 8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였는데, 이는 일본·중국과의 외교활동에 큰 기를 하게 된다.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서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 없이 직접 한글을 창제했다고 전해지지만, 한글의 반포·보급 작업은 집현전 학자들이 수행했다.

 

집현전(集賢殿)은 말 그대로 당대 최고의 인재를 모아 놓은 학문연구·국왕자문 기관으로, 정치적 관여를 엄격히 금지시켰다. 집현전 소속 학자들은 항상 붙어서 일을 하다보니 소속감·자부심이 높았을 뿐 아니라, 인재들 간의 경쟁심도 상당히 고취되었을 것이다. 신숙주는 박팽년·성삼문 등과 함께 훈민정음 해례본을 썼고, 한자의 한국어 발음을 표준화하기 위한 운서의 편찬·집필을 주도했다. 그 과정에서 중국학자의 자문을 받기 위하여, 신숙주는 성삼문과 함께 여러 차례 요동을 왕래했었다고 한다.

 

1447년 문과 중시에서 성삼문·신숙주는 각각 장원·을과로 급제하였다. 8~9년 전의 대과성적으로만 보았을 때는 신숙주가 성삼문보다 더 뛰어난 답안을 제출한 것으로 보이는데, 중시에서는 성삼문이 1등을 차지했다. 신숙주는 뛰어난 지략과 업무능력을 답안에 선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중시는 관료들 가운데 나라를 이끌어갈 리더를 선정하는 목적으로 치러지는 시험인 만큼, 국정운영의 올바른 마음자세를 내비친 성삼문의 답안이 세종에 의해 선택되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과연 이 때 신숙주이 성삼문을 질시하지는 않았을까.

 

목숨 걸고 편을 가른, 그 시대 


이전 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배신>에서 전근대사회는 확고한 계급구조와 가족·공동체에 대한 구속적인 의무를 특징으로 하기에, 배신행위가 사회적 규범·가치를 위반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추방이나 심지어 죽음과 같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언급했었다. 예나 지금이나 반역세력쿠데타에 성공하면 구 정권에 충성하는 세력들이 배신자가 되기 마련이다. 이전 글 <계유정난의 시작, 서대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단종복위를 도모한 사육신 등은 매우 잔인하게 처형되었으며, 일가와 여식들도 죽거나 노비로 전락하는 비극을 겪었다. 현대인의 가치관에서 바라보면 비인간적인 사회라고 볼 수도 있지만, 당시의 가치관으로 보면 어쩌면 당연한 결과로 볼 가능성이 높다. 지금이야 역모와 연좌제라는 개념이 희미해지고 죄를 지을 경우에도 본인만이 사법체계상의 형법을 감당하면 되지만, 과거에는 죄인은 물론 씨(자손)를 남기지 않았다. 그 만큼 전근대사회의 처신은 하이리스크-하이리턴이 수반되었다.즉 자신과 가족, 동지, 가문의 과거와 현재를 송두리채 날리는 것을 담보로 베팅한 것이다.

 

수양에 모든 것을 베팅한, 동갑내기 관료

 

단종이 즉위한 후, 안평대군·수양대군을 내세운 종친·관료 간의 정치대결 구도가 형성되었다. 신숙주는 양측에서 영입제의가 있었다고 하니, 유능한 인사이더였음에 틀림이 없다. 1440년(세종 22) 신숙주는 함길도 도관찰사 김종서의 종사관으로 발탁되어, 6진을 개척하는 실무를 담당했다. 당시 김종서·신숙주는 서로의 충심과 문장력을 높이 평가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를 미뤄보아 신숙주는 기득권(안평·김종서)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정치적 열위에 있던 수양은 이를 뒤집기 위해서는 불시의 이벤트가 필요했는데, 이를 위해 죽음을 함께 할 동지를 찾고 있었다. 당시 수양은 다음의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사직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겠다"

 

계유정난이 있기 14개월 전에 자리한 수양과의 술자리에서, 신숙주는 동갑내기 수양의 진심어린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전해진다. 예로부터 "사람은 자기를 진정으로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고 했는데, 리더가 충신을 얻기 위해서는 그를 믿고 존중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수양은 인간을 매료시키는 매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신숙주는 수양을 선택한 대가로 목숨을 비롯한 많은 것을 잃을 각오를 했을 것인데, 이런 점에서 신숙주도 보통 배짱은 아니었다고 본다. 이후 세조는 신숙주와의 관계를 이상적인 군신관계로 표현하면서, 다음과 같은 급으로 칭했다고 한다.

 

제 환공의 관중

한 고조의 장량

촉 선주(유비)의 제갈공명

당 태종의 위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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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에게 압구정이 있다면, 신숙주는 담담정

 

수양은 왕위를 유지하는 과정에서는 신숙주의 머리를 활용였지만, 왕권을 획득하는 과정에서는 한명회가 큰 역할을 하였다. 권람의 소개로 신숙주를 알게 된 한명회는 친구·사돈의 관계로 발전했는데, 한명회가 신숙주보다 2살 위였다. 두 절친은 수양이라는 하나의 태양을 만나면서 권세·부귀·영화를 누리게 되는데, 그에 걸맞게 한강변에 풍류를 즐기는 공간을 소유하게 된다. 한명회는 남은 여생을 유유자적하기 위해 한강가에 정자를 지었는데, 자신의 호를 따서 압구(狎鷗亭)이라고 불렀다. 「스스럼없이 가깝게 지내는」이라는 의미를 가진 압(狎)과 구(鷗, 갈매기)를 합쳐진 압구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갈매기와 벗하며 욕심 없이 자연과 어울린다"

 

한명회가 연산군에 의해 부관참시를 당한 이후, 압구정은 조선 말에 이르러 박영효의 소유가 되었다. 하지만 박영효도 갑신정변을 도모한 역모 혐의로 처형됨과 동시에 압구정은 철거되었다. 

 

삼절(三絶)시·서·화 3가지를 겸비한 문인화가를 말하는데, 삼절로 불린 안평대군은 스스로 궁궐에서 멀치감치 담을 쌓고 살았다. 인왕산 기슭에 저택 비화당와 무계정사를 지었고, 마포 담담정을 두었다. 유토피아(이상향)을 꿈꾼 안평의 은거의지는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잘 나타나 있다. 안평이 그림을 설명한 도원기를 완성한 이후, 박팽년이 서문을 넣고, 21명 문인에게서 찬문을 받았다. 안평의 꿈 속에서 무릉도원을 함께 한 3명은 박팽년·신숙주·최항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신숙주·최항이 안평의 반대편에 섰다. 이상주의자 안평은 급변하는 정치적 상황에서 현실적인 선택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상(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해서 어린 조카의 왕위를 지켜야 했고, 이런 선택이 자신의 최후에 어떻게 작용할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안평을 제거한 수양은 동생의 흔적을 모조리 없앴다고 한다.

 

인왕산 무계정사와 마포 담담정(淡淡亭)은 안평대군의 안가 역할을 하던 곳으로, 라이벌 수양의 감시를 항상 받아 왔다. 이전 글 <조선 기생과 일본 접대가 만나서, 요정>에서는 일본의 하급 사무라이들이 쿠데타를 계획하는 비밀회의 장소로 게이샤 찻집을 주로 이용했다고 언급했었다. 수양은 계유정난을 일으키기 전에 안평이 마포 담당정에서 지지자를 모아놓고 정치세력화를 도모했다는 점을 비난했다. 담담정은 서적 1만권과 귀한 서화와 골동품 200여점을 보관하던 곳으로, 안평은 이 곳에 선비들을 불러다가 시문을 짓곤 했다고 한다. 세조는 담담정을 신숙주에게 하사하였고, 그 자리에 지어진 신숙주의 별장을 자주 행차하면서 여유를 즐기곤 했다고 한다. 안평이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담담정을 활용했다고 알려졌지만, 문예가로서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풍류를 즐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후 담담정은 터만 남았다가,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별장인 마포장(馬浦莊)이 지어졌고, 해방 이후 귀국한 이승만은 돈암장에서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기는 중간에 약 2달 가량을 이 곳 마포장에서 머물었다. 이화장도 신숙주의 손자의 집터라고 하니, 이쯤되면 고금을 막론하고 고위급 정치인들 간의 인연은 한정된 자원에 복잡하게 얽혀있다.

담담정과 압구정 위치 지도 카카오맵
담담정과 압구정 위치 [지도:카카오맵]

위 내용을 정리하면, 신숙주는 명문지역에서 명문가 자제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아 과거에 급제하고, 입조하여서는 왕들의 총애를 받으면서 입신하였다. 이전 글 <조선 내내 왕가의 공간, 서울공예박물관 터>에서는 성종의 즉위 배경으로 정희왕후의 의지, 장인 한명회의 영향과 함께 신숙주 등의 훈신의 이해관계가 있다고 언급했었다. 신숙주는 1475년(성종 6)에 사망한 이후, 조선의 선비들로부터는 큰 비난을 받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들어 출간한 일부 서적들에서 충절의 상징인 사육식을 찬양하고, 배신의 상징인 수양과 신숙주를 폄하하는 경향이 나타났다고 한다. 세간에 알려진 부인 윤씨의 자책과 정순왕후를 탐했다는 행동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다만 신숙주에 실망한 백성들이 쉽게 변하는 녹두나물을 흔히 숙주나물로 부른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신숙주의 선택과 세조의 폭음·예민함이 이해되는 부분도 있다. 왕조시대를 경험 못해본 한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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