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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인간계에서는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었던, 천연두

by Spacewizard 2023.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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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이전을 배경으로 한 사극을 보면, 여러 측면에서 고증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비난받는 경우가 많다. 주로 의복이나 주거형태가 지적되곤 하는데, 거의 100% 고증되지 못한 부분을 뽑으라면 단연코 얼굴의 곰보자국이 아닐까한다. 물론 극이라는 특성상 주인공의 외모는 항상 시청자를 매료시켜야 하지만, 현실에서 조선시대 이전의 대부분 사람들은 얼굴에 흉측한 흉터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알아야 한다. 거꾸로 말해 현재를 살아가는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외모상태를 가지고 살아가며 사랑하고 있다. 이전 글 <압력과 어둠으로 가득한 공간, 심해>에서는 약 30~40년 전 VCR 기술의 발전과 비디오가게의 등장으로 문화적 경험이 한 단계 점프했었다고 언급했다. 당시 비디오가게에서 빌린 비디오를 재생하면 항상 첫 화면에는 만화영상과 함께 다음의 멘트가 흘러 나왔었다.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

 

어린 시절이라 전쟁을 제외한 호환·마마는 뭔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오늘은 과거의 사람들이 위생·세안과 상관없이 반듯한 피부를 가질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였던 천연두(마마)에 대해서 알아보자.

 

낯선 문명을 파괴시키는 살상무기, 천연두

 

인류는 농경과 더불어 정착생활을 하면서 가축을 기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가축들은 인류에게 전에 없던 전염병을 옮기게 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소(천연두·결핵·디프테리아), 개(홍역·우역), 말(감기), 돼지·닭(독감), 물소(나병) 등이 있다. 이 중 천연두는 그 등장시기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약 1.6만년보다 이전에 설치류 바이러스에서 진화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오르도폭스바이러스 속 바리올라마요르(Variola major, 천연두바이러스)의 감염으로 발생한다. 천연두의 가장 오래된 흔적으로는 약 BC 1145년에 만들어진 고대 이집트 파라오 람세스 5세의 미라가 유력하다. 이후 이집트 상인에 의해 인도로 전파된 천연두는 이후 2000년 간 인도의 풍토병으로 자리잡았고, 기원전 1세기경 중국을 거쳐 6세기 들어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유럽에서도 인구가 증가하는 16세기 들어 천연두가 창궐하게 되고, 16~18세기 대항시대에는 유럽의 탐험가들이 천연두를 신대륙(아메리카)을 포함한 전세계로 퍼트렸다. 15세기까지 폭스(Pox)로 불린 천연두는, 매독(Great Pox)과 구분하기 작은 폭스(small pox)로 불리게 된다. 참고로 특정지역에서 발생하고 그 지역민들만이 면역을 가지는 풍토병(endimic)과 달리, 여러 지역에서 급격히 확산되는 질병을 범유행병(pandemic)이라고 합니다.

 

16세기 스페인이 신대륙의 2개의 거대제국(아즈텍·잉카)을 무너뜨린 힘은 무력이 아닌 천연두였는데, 당시 신대륙 원주민들은 구대륙의 전염병에 대면역력 전혀 없었다. 스페인의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즈텍제국을 점령하면서 30만명의 원주민 중 절반 이상이 천연두로 사망하였으며,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피사로도 200명이 채 안되는 병력으로 잉카제국을 정복하였다고 한다. 천연두가 1518년 서인도 히스파니올라섬, 1520년 아즈텍제국, 1525년 잉카제국으로 차례로 전파되었고, 이후 홍역·독감·티푸스(Typhus)까지 연이어 발생하면서 면역력 없는 원주민의 90% 이상이 수십년 안에 죽게 된다. 영국·프랑스의 북아메리카 정벌에도 이러한 취약점이 이용되었는데, 영국인들은 천연두에 오염된 담요를 인디언들에게 선물로 주기도 했다고 한다.

인디언에게 천연두균이 담긴 담요를 선물하는 영국군 출처 나무위키
인디언에게 천연두균이 담긴 담요를 선물하는 영국군 [출처:나무위키]

반면 신대륙에서는 라마를 제외하고는 가축을 키우지 않았서 풍토병이라고 할 것이 없어서, 유럽인은 풍토병에 대한 피해는 없었다. 유럽은 아프리카를 침략하는 전략으로 식민지화가 아닌, 해안가에 무역거점을 설치하는 안전한 방식을 택했다. 그 이유는 아프리카인들은 오래 전부터 유럽과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유럽의 질병에 대한 내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의 풍토병(말라리아·황열병 등)에 대한 면역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대륙을 수월하게 접수한 유럽인에게 남은 큰 고민은 플렌테이션 운영에 필요한 노동력이었는데, 플렌테이션(plantation)은 넓은 땅에 하나의 상품성이 높은 작물을 생산하는 고효율 농업을 말한다. 간신히 생존한 소수의 경험없는 원주민들로는 플랜테이션의 노동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그 노동력 공백을 면역력이 강한 흑인노예(아프리카인 노예)들이 채운 것이다. 하지만 아프리카인을 끌어들인 선택은 또 다른 보건적 문제를 가져왔으니, 신대륙인·유럽인 모두에게 치명적인 아프리카 풍토병의 유행이었다. 특히 말라리아(16세기 말)와 황열병(17세기 중반)은 많은 유럽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고, 이는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인구구성에서 백인비율이 매우 적은 이유이다. 이전 글 <비좁은 공간으로 사회적 비용을 키우는, 교정시설>에서는 영국은 1787년 이후 근 60년 간 죄수들을 이송해 호주를 개척하였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호주로 유입된 죄수·이주민들은 구대륙의 풍토병까지 고스란히 가지고 왔으니, 이로 인해 면역력이 전혀 없었던 호주 원주민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갈 수 밖에 없었다.

 

죽음 아니면 곰보자국을 남긴, 마마신

 

「천연적으로 걸리는 두창」이라는 의미를 가진 천연두(天然痘)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표준화되었고, 그 전까지 「콩알(豆)처럼 부풀어 오르는 병」이라는 의미의 중국식 표기 (痘)·두창이라 불렀다. 「백살을 먹어도 한번은 앓아야 한다」고 하여 백세창이라 불린 천연두는 대부분의 사람이 감염되었고, 그 중 20% 이상은 사망했다. 이진(二疹)은 두진(천연두)·마진(홍역)을 말한다. 어릴 적에 이진을 앓지 않은 사람은 장성하여도 사람취급을 안해줬는데, 이는 언제 발병해서 죽을지 모르는 목숨이었기 때문이다. 천연두는 보통 10살 전후에 발병을 하였으며, 적어도 20살 전에는 대부분 않았다. 천연두는 감염률과 사망률이 모두 높았던 탓에 가장 무서웠던 질병 중의 하나였는데, 오래 전부터 민가에서는 천연두를 왕족에게 붙이는 극존칭 「마마」라고 불렀다. 당시로서는 피해갈 수 없었던 천연두를 마마신이 강림했다는 미신으로 굳게 믿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이와 무관하게 천연두에 걸린 환자는 집안의 가장 큰 어른으로 모셔졌고, 마마신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행동은 철저히 금기시했다. 대표적으로 소란·잔치·비린음식·육식·술·빗질·새옷·제사·상주만남·성관계 등이 금지되었다. 천연두가 무사히 지나가면 마마신에 대한 작별의식으로 배송굿(손님굿·마마굿)이 치러줬는데, 여기서 배송(拜送)은 「엎드려 절해서 보내드린다」는 의미로, 여기서 파생된 「마마손님 배송하듯」표현은 싫은 사람이 집에 찾아올 때 적당히 구슬려서 보내는 것을 뜻한다.

 

천연두에 걸리면 보통 10~20일 사이에 6가지 단계의 증상을 거치게 된다.

 

발열 : 얼굴이 빨개지며 발열 시작

출두 : 콩알처럼 두드러기 돋음

기창 : 점차 두드러기 부풀음

관농 : 고름이 맺힘

수엽 : 딱지가 생기기 시작

낙가 : 딱지가 떨어짐

 

천연두로 사망하는 주된 원인은 발병 초기의 고열이었는데, 기창단계에서 고열이 정점에 이른다. 40도가 넘는 고열은 뇌조직이 변성·파괴시키는데, 죽음이 아니더라도 지적장애·시각장애·청각장애 등 고열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었다. 고름에 딱지가 앉기 시작하는 수엽단계부터는 치명적이지는 않았으나, 곰보가 되지 않으려면 딱지가 이쁘게 잘 떨어져야만 했다. 이처럼 한차례 천연두가 지나간 이후에는 체내항체로 인해 다시는 재발이 없었다. 1980년대에도 중년들에게서 곰보자국을 가진 사람이 간혹 보였으니, 그 이전에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곰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 조선시대에는 3명 중의 2명 정도가 곰보자국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여성들에게 있어서 곰보자국은 정말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구멍들이나 반복적인 패턴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나타내는 현상을 환공포증(Trypophobia)이라고 한다. 환공포증을 천연두의 흔적인 곰보와도 연결시켜 볼 수도 있는데, 진화론적 관점에서 곰보자국을 혐오스럽게 느끼도록 진화함으로써 천연두의 전파위험을 회피하려 했을 수도 있다. 곰보자국을 가진 여성을 못생겼다는 의미로 '박색하다'라고 불러왔는데, 여기서 박색은 「얼굴이 얽었다」는 의미로 곰보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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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난 홍타이지를 물러나게 한, 마마

 

16세기 만리장성 이북의 초원지대 유목민 사회에서 천연두를 앓았다는 기록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몇 달이 지난 시점의 「청태종실록」에서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2대 황제 홍타이지(누르하치 8남)가 마마를 피해서 먼저 귀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마를 경계하고 피하는 자세·행동을 피두(避痘)라 하며, 출정 당시 홍타이지는 천연두을 걸린 적이 없었던 생신(生身)이었다고 한다. 원래 천연두는 겨울과 봄에 전파속도가 가장 빠르고, 실제 병자년에 한성에서 마마가 유행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홍타이지가 직접 천연두에 감염되었는지, 아니면 청군진영 내에서의 천연두 유행으로 황제신변에 위협을 느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미 천연두에 감염된 상태였다면, 굳이 성치않은 몸을 이끌고 귀국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홍타이지는 병자년 조선정벌을 성스럽고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말하면서, 직접 출정까지 감행하였다. 하지만 남한산성 항쟁이 한창이던 1637년 1월 16일을 전후하여 청군진영에서 큰 전략변화 감지되었는데, 청이 전쟁의 서둘러 종결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던 것이다. 당시 남한산성 내에서는 주화파와 척화파의 대립으로 인조가 의사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청이 조선을 본격적으로 회유·압박하기 시작했다. 1월 17일 홍타이지가 산성으로 보낸 국서의 내용은 이렇다. "지금 그대가 살고 싶거든 빨리 성에서 나와 귀순하고 싸우고 싶거든 또한 속히 일전을 벌이도록 하라. 양국이 싸우다 보면 하늘이 처분을 내려줄 것이다." 1월 18일에는 예조판서 김상헌이 이조판서 최명길이 지은 국서를 찢었고, 국서에는 홍타이지를 폐하로 칭했다. 1월 19일부터 국서에는 조선왕을 청황제의 신하로 칭하였다. 결국 1월 30일 인조는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었다. 당초 홍타이지는 한성의 궁에서 승전식을 올릴 계획이었으나, 이마저도 생략하고 2월 2일 심양으로 돌아갔다. 천연두가 창궐하고 있던 한성으로 입성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홍타이지는 심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도 영접나온 조선관리와의 접촉을 피했다고 한다. 2월 21일 심양에 도착한 홍타이지는 인질로 데려온 소현세자 일행과의 만남도 1달 가량 미뤘을 정도로 철저하게 피두를 하였다.

 

만일 홍타이지가 천연두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고 한다면, 조선왕조는 지나온 역사보다 더 철저히 파괴되어 처절하게 문을 닫았을지도 모른다. 청 황실은 천연두에 걸릴 가능성에 대해 늘 경계심을 가져왔고, 홍타이지는 1626년 즉위한 이후부터 천연두에 걸리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을 것이다. 홍타이지는 천연두가 유행하는 시기에는 회의·연회에 참석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병자호란이 발발하기 5년 전인 1631년 다이샨(누르하치 차남, 홍타이지 이복형)의 5남 발라마가 천연두로 사망했다. 1632년 홍타이지가 망굴타이(누르하치 5남)의 장례에 참석하지 않은 배경에도, 정치적 이유 외에 피두의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2년이 지난 1639년에는 요토(다이샨 장남)과 마잔(다이샨 6남)이 화북 원정 도중에 천연두에 사망했다. 결국 1643년 홍타이지는 뇌출혈로 사망하였는데, 5세의 어린 나이에 3대 황제로 즉위한 순치제(홍타이지 9남)는 23세의 젊은 나이에 천연두로 사망하게 된다.

 

전염병 대처의 기본, 격리 

 

백신이 개발되기 전의 천연두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질병이었기에, 발병과 동시에 신속히 격리했다. 이러한 격리조치는 2020년 유행한 COVID-19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가족이 천연두에 걸리면 대문 앞에 깃발을 세우거나 금줄을 쳐서 사람의 접근을 막았고, 노비가 천연두에 걸리면 집 밖에 움막을 지어서 격리시켰다고 한다. 왕실에서도 천연두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14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숙종은 23세가 되어서야 천연두에 걸렸는데, 천연두에 대한 면역력이 없는 국왕을 보호하기 위해 즉위 후 9년 간 철저하게 피두하였다고 한다. 이는 앞서 말한 홍타이지나 순치제와도 비슷한 입장이었던 것이다. 숙종의 동갑내기 왕비 인경왕후가 이미 3년 전에 천연두로 사망했던 터라 명성대비(숙종 모)의 근심이 유난했다고 한다. 마마신에 대한 금기사항은 왕실도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명성대비는 천연두에 걸린 숙종의 밥상에서 비린 음식과 육식을 모두 뺐으며, 심지어 궁궐 내에서 불을 때는 것도 우려하여 궁 밖에서 음식을 짓게 했다고 한다. 또 중종이 승하한 직후, 인종은 왕위에 오르고 이복동생 경원대군(훗날 명종)은 천연두에 걸리게 된다. 강한 성격의 문정왕후(중종 왕비, 명종 모)는 천연두에 걸린 경원대군의 안위가 걱정된 나머지, 중종의 시신이 왕릉에 안치될 때까지 매일 아침 시행해야 하는 곡·제사를 금지시키려 하였다고 한다.

 

천연두로 죽은 시신은 처분을 하였는데, 여기서 처분은 「그냥 밖에다 내다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마마신이 깃든 시신을 땅에 묻으면 땅 속에서 마마신이 따뜻하게 보내다가 이내 다시 돌아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주로 풀숲에 넣어 두었다가 뼈만 남은 상태가 되면 다시 수습하여 묻었다고 한다. 찬바람을 맞으면 마마신이 추워서 떠난다는 믿음도 있었는데, 지푸라기로 덮어서 성벽 내지는 나무기둥에 세워 두거나, 나무에 매달아 놓기도 했다. 하지만 오래된 풍습이었던 시신방치는 여러 문제들을 가져왔다. 일단 짐승들이 시신을 뜯어 먹는 광경이 자주 연출되었으며, 그로 인해 시신의 일부는 지푸라기에서 튀어나와 여기저기 흩어지곤 했다고 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세종은 시신방치를 금지하는 정책을 내놓기도 했었다고 한다. 마스크를 잠시만 벗어도 전염될 수 있다는 우려를 안고 살아었던 최근 COVID-19 대유행 시기와 비교하여 전근대시대를 바라보면, 가뜩이나 전염성이 큰 천연두가 잊혀질 만하면 재유행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천연두의 공포를 떨쳐준,

 

천연두를 예방하기 위한 첫 시도는 천연두 환자의 고름이나 딱지를 피부에 접촉시키는 인두법(variolation)었다. 15세기 중국에서 최초로 시행된 인두법은 인도·소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전파되었으나, 안정성의 문제로 널리 시행되지는 않았었다. 조선에서는 1799년 정약용이 의주에 사는 선비로부터 종두에 관한 책을 전달받아, 1800년(정조 24)에 종두에 관한 저서를 지었다. 그에 앞서 1798년에는 홍역(마과·마진) 계통의 질병과 그 치료법들을 모아서 정리한 마과회통」을 짓기도 하였다. 이렇듯 정약용이 전염병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 자신이 어릴 적에 완두창(천연두의 일종)을 앓아서 눈썹에 흉터를 가지고 있었다. 그 흉터로 인해 3갈래로 나뉘어진 눈썹을 본따 지어진 이름이 어릴 때 호인 삼미자(三眉子)였다. 또한 정약용은 자녀 9명 중에 6명을 천연두로 잃었다.

 

1796년 영국인 의사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는 「소젓을 짜는 여인들이 우두를 코로 흡입한 이후, 천연두에 잘 걸리지 않는다.」는 가설을 검증하는 실험을 하였다. 우두가 인간에게는 대체로 경미한 증상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우두를 통해 천연두에 대한 면역을 확보할 수 있으면 더 할 나위 없는 발견이었던 것이다. 사람의 피부에 우두 고름을 삽입하고 6주 후에 천연두 고름을 접종한 결과, 제너는 가설이 사실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로써 우두바이러스를 이용하여 면연력 높여 질병을 예방하는 종두법(vaccination)이 발견된 것이다. 종두란 천연두 예방의 목적으로 우두(cowpox)를 사람에게 접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에는 19세기 후반 지석영이 종두법을 보급하게 된다.암소를 의미하는 라틴어 바카(vacca)를 차용하여, 제너는 접종에 사용한 물질을 백신(vaccine)이라 불렀다.

제너가 천연두 백신을 접종하는 그림 출처 Wikimedia Commons
제너가 천연두 백신을 접종하는 그림 [출처:Wikimedia Commons]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바이러스가 세계사에 미친 영향을 지대하다. 인간세계에서는 도저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거대제국이나 기라성 같은 절대강자들도 전염병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으니, 그저 인류는 자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왕실 입장에서 병자호란은 졌지만 이겼다고도 볼 수 있는 전쟁이다. 홍타이지가 출정 전에 이미 천연두를 겪었었거나 천연두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면, 과연 조선왕실의 종묘사직을 지켜졌을지 의문이다. 최근에 들려오는 익숙한 용어로 원숭이두창(Monkeypox virus, MPOX)이 있는데, 이는 천연두와 비슷한 증상을 보인 실험실 원숭이에게서 발견되었다. 2022년 5월 원숭이두창이 풍토지역(아프리카 콩고)을 벗어나 북미와 유럽 등의 비풍토국으로 감염사례가 확대되었고, 심지어는 6월에 한국에서도 감염자가 발생했다. 원숭이두창이 천연두보다는 증상·치명률이 가벼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COVID-19의 트라우마가 가시지 않은 시기였던지라 또 다른 전염병에 대한 본능적인 불안은 어쩔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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