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어질수록 소심해지는, 인생살이
스스로 끊임없이 숙고하는, 각성
자신의 한계를 알 수 있는 기회, 곤경
평생 수행해야 하는 이유, 존재의 미완성
서서히 고요하게 견디는 힘, 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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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책상에 서적들이 많이 세워져 있는 편인데, 자주 손이 가는 책은 세로로 나열된 책들 위에 눕혀져 있는 노자·공자에 관한 책이다. 40대 중반의 인생을 살다보니, 그들의 말들이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이는 인생살이의 내공이 생겼다기 보다는, 살아온 날의 위험요인(리스크)들로 인해 소심해졌다는 표현이 맞을 듯하다. 동서양을 막론한 성인들의 깨달음은 현대를 살아가는 위태롭고 나약한 인간들에게 짧지만 강력한 지침을 제공함은 분명하다. 각성(覺醒)은 깨거나 또는 자극에 반응을 보이는 생리적·심리적 상태를 말하는데, 철학적으로는 자기 스스로 끊임없이 내구·숙고하는 과정이다. 본질적으로 사람은 하루에 3번의 각성을 함으로써 성찰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인생에서 3번의 각성은 다음과 같은데, 오늘은 노자의 「도덕경」 일부에서 인용하여 내적각성에 대해서 알아보자.
① 자신을 알고
② 자신을 수련하고
③ 자신을 잘 대해주는 것
각성 1) 知人者智(지인자지), 自知者明(자지자명) <도덕경> 33장
남을 아는 자는 지혜롭지만, 자신을 아는 자는 총명하다
다른 사람의 성격을 아는 것 보다, 자신의 본성을 파악하는데 더 힘을 쏟아야 한다는 말이다. 세상을 살면서 혼란한 관계나 난감한 상황에서 옳고그름을 분별하거나 다른 사람을 읽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지만, 정작 자신을 알고,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것은 매우 어렵다. 사람은 자신을 알아야 비로소 진정으로 각성하기 시작한다. 사람은 안정되고 순조로운 시기에는 자신을 알기가 어려우며, 긴급한 곤경에 처해야만 진정한 자신을 직면·이해하게 되고 스스로의 한계·두려움을 볼 수 있다.
손자가 "나를 알고 상대방을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지만, 흔히들 여기서 상대방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상대방 못지않게 알아야 하는 대상이 바로 자신이다. 이전 글 <삶에서 예비훈련이 필요한, 위험>에서 손자는 "싸우기 전에 이겨놓고 싸워라"고 말하면서, 먼저 상대방의 전력과 나의 전력을 파악해 승기가 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인간성(자신+타인)은 서로 통하고, 자신(한계)을 알아야 다른 사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돌파하기 어려운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사람을 알아야 자신을 더 잘 볼 수 있는 법이다. 인간성을 깨닫아야지만 혼란스럽지 않고 걱정을 덜 수 있다.
각성 2) 夫唯不盈(부유불영) 故能蔽不新成(고능폐불신성) <도덕경> 15장
무릇 채워질 것이 없기에, 능히 이루었고 새롭게 할 것이 없다.
도를 실천하는 사람은 어떤 이들이고, 어떠한 특성을 가지는지를 말해준다. 깨달음을 얻는 도인은 일반인과 같아 보이지만, 뭔가 다른게 있다. 소심해 보이지만 사물을 통찰하고 있으며, 멍청해 보이지만 상대의 기운을 쫒고 있으며, 탁해 보이지만 그 내면을 일반인이 보지 못할 뿐이다. 세상 제일가는 도인인 척 하는 사람들은 과연 도인인가. 도인은 그저 자신을 미완성의 존재로 받아들이며, 채우든 비우든 그 자체를 즐기면서 존재하는 것이 도인이다. 하지만 무조건 채우려는 욕망으로 가득한 일반인은 오히려 도인들을 실패한 사람으로 매도할 수 있다. 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남긴 아래의 유훈에도 잘 나타난다.
인생은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지고 먼 길을 가는 나그네와 같다
그러니 서두르지 마라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되는 일도 없으니 불만을 가질 이유도 없다
인내는 무사장구(無事長久, 무탈하게 오래도록 버티는 것)의 근본이고, 분노는 적이다
풀잎 위의 이슬도 무거우면 떨어지고, 달도 차면 기울기 마련이니
이기는 것만 알고, 지는 일을 모른다면 몸에 화가 미친다
자신을 책할지라도, 남을 책하지 마라
부족함이 지나침보다 낫다
의도를 선한 것으로 포장하면, 종종 역효과가 발생한다. 선행(외면)을 꾸밀 수 있을지 몰라도, 선의(내면)는 숨길 수가 없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선의가 가장 강하며, 무의식 중에 드러나는 정성이 가장 감동적이다. 항상 자신의 마음을 깨닫고 거짓을 진심으로 대체한다면, 마음이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수련한다는 것은 마음을 깨트림으로써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항상 자신과 말 한마디를 단련하고, 마음을 고치면서, 자만하지 않고, 나쁜 습관을 없애고, 새로운 지식과 덕을 쌓아야 한다.
정약용이 마음에 품은, 15장
豫焉若冬涉川(예언약동섭천) 猶兮若畏四隣(유혜약외사린)
겨울 내를 건너듯 머뭇거리고,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 주춤거려라
정약용은 「도덕경」15장을 유독 좋아했다. 두물머리는 남한강과 북한강에서 흘러온 2개의 물줄기가 만나는 곳으로, 흔히들 양수리(兩水里)라고 부른다. 이 곳 두물머리 주변에 정약용의 생가와 묘가 있다. 정약용은 정조의 총애를 받은 초계문신(임금이 직접 시험을 보아 선발한 선비)이었는데, 북학파 선비들과 함께 규장각(정조가 만든 학문 연구소)에서 많은 연구를 하였다. 이전 글 <특권층 의리의 시대, 세도>에서는 순원왕후(순조 정비)의 아버지로서 순조시대에 정치권력을 장악한 안동김씨 김조순이 초계문신으로서 정조에게 신임을 받았다는 언급을 했었다. 다산은 1800년(정조 24)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정적들이 자신을 향해 칼끝을 겨누자 모든 관직을 버리고 남양주 마현으로 낙향하여, 사랑채 앞에 여유당(與猶堂) 편액을 걸었다.
현재 알려진 「도덕경」은 243년 위진시대에 18세의 왕필이 정리·완성한 「노자도덕경주」로, 이를 「왕필본」 또는 「통용본」이라고도 한다. 1973년 중국 장시성의 마왕퇴(BC 168년 추정)에서 발굴된 「백서본」은 왕필본과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이는 왕필과 그 이전의 여러 사서에 인용된 저서가 백서본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백서본은 2종류가 있는데, 갑본(甲本)은 BC 247년 이전의 전국시대 말기, 을본(乙本)는 BC 195년 이전의 한나라 초기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BC 1세기 후반 전한 말기에 들어, 약 5,000자로 쓰인 도덕경이 상편 「도경(1~37장)」과 하편「덕경(38~81장)」으로 나뉘어진다.
정약용은 「여유당기」에서 자신의 당호 여유당을 「도덕경」 15장에서 따온 것이라고 밝혔다. 도덕경 백서을본에서는 앞 문장의 豫(예)를 與(여)로 쓰고 있다. 예(豫)는 코끼리에서 비롯된 글자로 코끼리처럼 주저하고 머뭇거리다는 뜻이고, 유(猶)는 원숭이에서 나온 글자로 두려움이 많은 원숭이가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는 모습을 의미한다. 흔히 쓰이는 유예(猶豫)가 여기서 유래되었는데, 망설이며 일의 결행을 미룬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당시 정약용은 자신이 처한 정치적 처지를 고려하여, 항상 머뭇거리고 살피라는 의미의 여유(與猶)를 당호로 삼지 않았나 싶다. 낙향 후 학문에 전념한 정약용도 중앙정치의 칼바람을 피하지는 못했다. 순조를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했던 정순왕후와 주변의 노론세력들은 개혁파 선비를 대거 숙청하였는데, 이때 정약용도 그 대상이었다. 180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포항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1818년 그의 나이 57세에 18년이라는 긴 유배생활을 청산한 후, 꼬박 열사흘을 걸어 남양주 마현으로 돌아온다.
흙탕물과 같은, 세상의 도
孰能濁以靜之徐淸(숙능탁이정지서청)
누가 능히 탁한 것을 고요하게 하여 서서히 맑아지게 하고
정약용이 오랜 유배생활의 풍상을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힘은 서청(徐淸)에 대한 믿음이었다고 한다. 정약용은 세월을 견디다 보면 언젠가는 어두운 시절이 지나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심경은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 곳곳에 담겨있다. 노자는 도의 속성을 흙탕물에 비유하였는데, 흙탕물을 맑게 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그냥 그대로 가만히 두는 것"
흙탕물을 깨끗하게 하려고 인위적으로 휘젖게 되면 더욱 탁해진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의 핵심은 정(靜, 고요할)과 서(徐, 천천히)이며, 순리대로 일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작위를 배제한 채 고요하게 천천히 진행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인생에서 많은 고통·실패를 경험한 아브라함 링컨은 아래의 글귀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This, too, shall pass away
(이 또한 지나가리라)"
「미드라시」의 기록에 따르면, 전쟁에서 승리한 다윗이 승리의 기쁨을 기리기 위한 반지를 주문했다. 이 때 세공사에게 기쁨을 조절함과 동시에 절망에서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글귀를 새기라는 명령을 하였다. 이에 세공사가 자문을 구한 솔로몬 왕자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Et hoc transibit)"라 말했다고 한다. 「찾다·탐구하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다라시(darash)에서 유래한 미드라시(Midrash)는 유대인들의 율법·성서 주석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지나가고 변해간다. 당장의 상황이 기쁘다고 교만하지 말고, 고통스럽다고 좌절할 필요도 없다. 기쁜 일이든 고통스런 일이든 지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의연한 자세를 가지라는 내용에서 서청의 믿음을 엿볼 수 있다.
각성 3) 天地尙不能久(천지상불능구) 而況於人乎(이황어인호) <도덕경> 23장
하늘과 땅도 이처럼 이런 일을 오래 할 수 없는데, 하물며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천지 조차도 오래 할 수 없으며 무력한 경우가 많은데, 천지 사이에서 태어난지 불과 수십년된 사람이 할 수 있는게 뭐가 있겠나. 궁극적인 각성은 강요·죄책감 없이 그저 자신을 잘 대해주고 자연에 순응해야 하는 것이다. 자연계에 비해 인간계는 미미하며, 순식간에 변하고, 통제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 차 있다. 때로는 자신을 고난으로 밀어 넣는 것이 용기이며, 때로는 자신을 놓아주는 것이 통찰력일 수도 있다. 변화무쌍한 인생에서 그저 자연에 순응하는 내면을 따르는 것을 후회하지 않아야 한다. 비록 일이 헛되이 가더라도.
마지막으로 인생에서의 3번의 각성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知己力(지기력)으로 盡人事(진인사) 待天命(대천명)
① 지기력 : 자신을 알고, 한계를 알고, 본성을 각성한다.
② 진인사 : 자신을 수련하여, 경지를 높이며, 내면으로 각성한다.
③ 대천명 : 자신을 잘 대하고, 자연에 순응하며, 영혼이 각성한다.
[Music] 고요하게 느린
https://www.youtube.com/watch?v=20jDWtQZq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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