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통계에 근거했는지 모르지만, 국민학생 시절이던 1980년대 마산이 「전국 7대 도시」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추측컨대 일제강점기의 식민기지로서의 독점적 항구역할을 하면서 확보된 인프라, 해방공간·전쟁공간에서 몰려들었던 유입인구, 그리고 고속성장기의 노동력·자본의 집중이 큰 기여를 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오직 일본과 일본인의 경제적 이익만이 추구되었던 마산은, 해방 이후 귀환동포와 피난민들로 대체되면서 활력이 넘치게 된다. 한국전쟁 이후 마산에서 부를 쌓은 사람 중에는 마산을 떠나지 않은 이들도 많았다고 하는데, 흔히 대북리스크(북한의 남침위험)이 높았던 반면에 당시로서는 서울에 비해 부산·마산이 크게 열악한 거주환경도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서울에서 자리잡은 마산 출신의 지인들끼리의 술자리에서 가끔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있다.
"우리 집안 조상들도
과거에 서울(내지 경성·한성)로 상경하여
땅을 좀 사놓으셨으면
지금쯤 부동산 재벌가가 되었을텐데..."
물론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태어난 공간에서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자본개념이 희미했을 뿐만 아니라 부동산을 자산으로 여기는 사고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현재의 서울을 살아가는 청·장년층들이 안고 있는 주거용부동산 문제가 그만큼 심각할 정도이기 때문에 나오는 풍자놀음 정도로 보면되겠다. 과거의 마산은 꿀과 젖이 흐르는 도시였다. 오늘은 마산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자.
역사적 지명 유래, 창원+마산
중국의 정사서 「삼국지」에 따르면, 삼국시대 이전에 한반도 남쪽에는 다음과 같이 삼한(3개의 광역부족국가)가 존재했다고 한다.
마한(馬韓) : 54개국 (현 경기도·충청도·전라북도)
진한(辰韓) : 12개국 (현 낙동강 동부)
변한(弁韓) : 12개국 (현 낙동강 서남부)
포상팔국(浦上八國)은 한반도 남단에 위치한 부족국가로, 이름과 달리 사료상으로 확인되는 국가명은 아래의 5개이다.
골포국(骨浦國) : 현 창원시 마산합포·회원구
칠포국(柒浦國) : 현 함안군 칠원면(칠서·칠북면 포함)
고자국(古自國) : 현 고성군 고성읍
사물국(史勿國) : 현 사천시 사천읍
보라국(保羅國)
보라국은 고려시대의 나주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 내용이 맞다면 포상팔국은 전라남도 해안까지 포함하는 범위일 것이다. 나머지 3개국에 대한 위치를 현재로는 알 수 없다. 「포상팔국 전쟁」은 포상팔국은 연합하여 가야(가라 내지 아라)를 침범한 전쟁으로, 신라의 진압으로 팔국이 패배하게 된다. 4세기 백제국(마한)과 사로국(진한)이 영토를 확장하면서 중앙집권형 국가로 거듭나게 되는데, 바로 백제·신라이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변한(훗날 가야)은 여전히 소국들의 집합형태를 유지했었는데, 대표적인 소국은 다음과 같다.
비자발 : 현 창녕
녹국 : 현 영산
안라 : 현 함안
다라 : 현 합천
가라 : 현 고령
남가라 : 현 김해
탁순 : 현 창원
신라 법흥왕은 남가라·가라를 각각 532년·562년에 차례로 정복하면서, 가야지역을 차지한다. 이후 신라에 복속된 탁순국은 굴자군이 되었으며, 이후 의안(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고려 충렬왕은 의안을 「의창」으로, 합포를 「회원」으로 변경하면서 현으로 승격시켰는데, 이는 원나라의 일본원정 과정에서 석두창(합포 조창) 통해 군량 등을 지원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당시 합포는 항구로서 최적의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긴 형태의 포구와 태풍의 방패막 역할을 하는 거제도 덕분이었다.
조선 태종은 의창과 회원을 합쳐 창원부로 승격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1601년(선조 34) 창원은 대도호부로 승격했는데, 이는 임진왜란 당시 부사 김응서와 군인·관인·백성들이 일본에 항복하지 않은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1592년 4월 부산에 상륙한 왜장 다데가 김해성을 함락한 뒤, 마산으로 들어와 마산왜성(용마산성, 현 산호공원 자리) 축성에 착수했다. 하지만 마산왜성이 완료된 시점은 정유재란이 한창이던 1597년 12월이라고 한다.
중종시대에 들어 합포라는 명칭이 과거 2번에 걸친 전쟁에서 패한 불길한 이름이라 하여, 오산(午山, 현 용마산)을 이름을 따서 그 일대를 오산진(내지 산호포)으로 통칭하게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오산진에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지역명을 바꿀 필요가 있었고, 오(午)가 12간지 중에 말(馬)에 해당되어 같은 의미의 다른 글자인 마산(馬山)으로 이름을 바꿨다. 즉 재해를 면하기 위해 오늘날의 지역명인 마산이 탄생한 것이다. 1663년(현종 4) 대동법이 시행으로 해로가 연결되는 전국 각지에 조창이 설치되었는데, 1760년(영조 36) 인근 8개읍(창원, 진해, 웅천, 함안, 칠원, 의령, 거제, 고성)을 관할하는 마산창이 설치되었다. 당시 마산창 일대에는 공관·민가가 집중되면서 다음 6개의 자연취락이 형성되었는데, 오늘날 마산의 원형이 되었다.
오산리
동성리
중성리
서성리
성산리
성호리
6개의 리는 현재의 창동 일대를 말하고, 창동의 골목길이 250여년 전 당시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간직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명칭이 오늘날의 행정동명으로도 이어졌지만, 지리적 일치성은 다소 없어 보인다. 마산창의 관아·본당인 유정당이 위치했던 자리가 현재 남성동 SC제일은행 자리인데, 당시에는 그 곳 앞까지 바다가 접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 마산은 원산·강경과 더불어 전국 3대 수산물집산지였고, 마산장은 전국 15대 장시 중 하나로 발전하면서 번성하였다. 20세기 초에 조창 일대(현 남성동)가 상업중심지였고, 그 동쪽(현 동성동)이 배후주거지였다. 아직도 코아양과에서 아구찜 골목을 아우르는 동성성 일대에는 좁은 골목길들이 남아있다. 당시 3개의 주요도로가 있었는데, 각각 부산(창원·김해 경유), 서울(칠원·창녕·현풍 경유), 진주(삼진 경유)로 향하는 길들이었다.
위상을 뒤바꿔 놓은, 부군면 통폐합
1914년 3월과 4월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에서 대규모 행정구역 개편을 실시하는데, 이를 부군면 통폐합이라고 한다. 그 전까지는 같은 군 단위 간에도 면적차이가 천차만별인 문제가 있었다. 1914년 통폐합 정책은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였음은 물론, 현재의 행정구역의 명칭과 영역경계의 기틀이 되었다. 1910년 한일합병 직후, 일본은 한성부를 '경기도 산하 경성부'로 변경하고, 일본인이 밀집한 개항장 지명도 기존 지명에서 아래와 같이 개항장(신시가지) 지명으로 바꾸었다. 다만 인천부는 제물포부가 이닌 원래의 지명을 유지했다.
동래부 → 부산부
창원부 → 마산부
옥구부 → 군산부
무안부 → 목포부
덕원부 → 원산부
삼화부 → 진남포부
부령군 → 청진부 (승격)
1914년 통폐합의 특징 중의 하나는 지역의 중심을 교통인프라(항만·철도·도로) 주변의 신시가지로 이전시켰다는 것이다. 이 때 행정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도농분리를 병행하였는데, 신시가지 일대로만 도시(부)의 영역을 축소·집중하고, 주변지역을 농촌(군)으로 분리하였다. 이때부터 마산부 주변에는 창원군이 위치하게 되었다. 1949년 부(府)를 시(市)로 일괄개칭하면서, 마산부는 마산시가 되었다. 1995년 1월 단행된 도농통합에 따라, 창원군은 마산시와 창원시로 각각 분리·편입되었다. 2010년 7월에는 3개시(창원·마산·진해)가 통합되면서 창원시가 되었으니, 조선시대 초기부터 불려오던 '창원'이라는 위상을 근 100년만에 되찾은 것이다.
국내 초창기 계획도시, 신마산
1899년 5월 개항 이후 마산포(구마산) 남쪽 2㎞에 위치한 해안마을 신월리·월영리 일대에 계획도시 각국공동조계지(훗날 신마산)가 들어섰다. 조계지(내지 거류지)는 외국인의 거주·통상를 승인하고, 외국의 행정권·경찰권이 미치는 치외법권이 인정되는 지역으로, 주로 개항장에 설치된다. 조계지는 특정 국가에만 인정되는 전관조계지와 여러 국가가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공동조계지가 있다.
1899년 11월부터 부산해관 마산출장소(전 마산창 자리)에서 총 4차례의 조계지 경매가 시행되면서 외국인들의 소유가 되었다. 1차 경매에서는 여러 국가들이 토지시세의 100배에 달하는 응찰금액을 제시할 정도로 흥행하였는데, 아마도 도시계획의 기본인 인프라(항구, 도로 등) 구축으로 인한 도시성장을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1900년 조계지에는 도로폭이 8m 이상이어야 된다는 조계장정에 따라, 마산 최초로 남북을 가로지르는 폭 14m의 신작로가 생겼다. 1901년 들어 인근 도시에서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마산으로 유입되었는데, 이들은 러일전쟁으로 집결된 군인과 그들을 대상으로 생업을 영위하던 일본인들이었다. 이때부터 조계지에서 상점을 생기기 시작했으며, 1904년 이후 소학교(현 월포초등학교), 병원, 공공시설 및 일본인 어업이민촌이 연이어 생겨났다.
2차 경매까지만 해도 러시아, 독일, 미국, 일본, 영국, 오스트리아 등이 참여한 공동조계 성격이었지만, 1905년 러일전쟁과 을사조약, 그리고 마산선(마산-삼랑진)의 개통으로 조계지는 일본이 독점하게 된다. 1910년 한일병합으로 일본인은 조계지를 넘어 구마산까지 진출한다. 1911년 일본은 마산항의 개항을 폐쇄하고 일본과의 단독무역만을 허락하였는데, 그 결과 마산은 물자수탈과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의 통로가 되었다. 1912년 구마산과 신마산을 연결하는 폭 14m의 도로(현 장군로)가 생기면서, 이때 그 주변으로 지방법원지청, 전기회사(현 마산합포구청 자리) 등 공공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이때까지 불과 10여년의 경과를 보면, 일본은 조선에 근대적인 도시계획을 도입했다는데 이의가 없을 것 같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신마산과 구마산의 중간 위치에 폭 넓은 도로를 개설하면서, 그 중심부에 두 지역을 동시에 관장할 수 있는 공공업무구역을 형성한 것이다.
달(월)의 고장, 신마산
857년(헌안왕 1) 6두품 집안에서 태어난 최치원은 12세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18세에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당나라 빈공과에 급제하였다. 10년 간 당나라 관직을 지낸 최치원은 28세의 나이로 귀국하였지만, 당시 신라는 부패한 진골귀족과 지방세력 간의 세력다툼으로 인해 혼란스런 상황이었다. 이러한 현실에 실망한 최치원은 벼슬을 버리고, 경주·영주·해운대·울산·지리산 쌍계사 등을 떠돌다가 경치가 좋은 합포에 자리를 잡았다. 합포에 '달그림자가 보이는 자리'이라는 의미로 월영대를 세운 그는 학문을 닦으며 후학들을 양성하기도 했으나, 왕건에게 보낸 글이 문제가 되어 가야산 해인사로 숨게 된다. 문제의 글은 「계림황엽 곡령청송(鷄林黃葉 鵠嶺靑松)」으로, 신라(계림)는 누런 나뭇잎처럼 국운이 시들어 가고, 고려(곡령)는 푸른 솔처럼 국운이 흥기할 것이라는 의미였다. 신마산 경남대 앞은 '월영대가 있는 길'이라는 의미로 댓거리로 불리는데, 불과 백여년 전만 하더라도 월영대 바로 앞은 해안가였다. 최치원과 관련한 지명이 신마산에 많이 남아 있는데, 특히 달(월)과 관련하여 월영리, 신월리, 완월리, 월포동, 두월동, 반월동 등이 있다. 그리고 그의 자인 고운(孤雲)·해운(海雲)을 따서는 해운동, 고운로, 해운대가 있다.
마산의 이미지를 만든, 저항정신
개인적으로 서울사람들이 인식하는 마산의 이미지는 억센 사투리와 함께 전투적인 성향이었던 것 같았다. 이마저도 1990년대 말 학번까지 해당되고, MZ세대들은 마산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그나마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 김재준(정우 분)이 「쓰레기」라는 별명과 함께 츤데레로 나온 이후, MZ세대들도 마산이라는 곳에 대해서 조금은 알게 되지 않았을까 한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마산에서도 일제에 대한 저항의 움직임은 있었다. 1919년 3월에 있었던 전국적인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이는 기독교계열, 민족주의계열, 교사·학생(창신·의신), 그리고 농민 등이 참여한 광범위한 투쟁이었다. 3월 3일 두척산(현 무학산) 시위를 시작으로 여러 차례 대규모 시위들이 일어났는데, 대표적으로 삼진연합대의거, 창원읍(현 창원시 소답동) 의거, 상남면(현 창원시 상남동) 의거가 있었다. 특히 「4.3 독립만세운동」으로도 불리는 삼진연합대의거는 삼진지역(진동·진북·진전)에서 일어났는데, 이 시위는 경기도 수원 제암리 의거, 평안북도 선천읍 의거, 황해도 수안 의거와 함께 4대 의거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고 한다. 해방될 때까지 일제에 대해 저항한 경험은, 해방 이후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으로 타겟을 바꾸어 저항하면서 민주화운동의 성지로 나아갔다.
독재권력에 겁없이 대항한, 민중
1960년 3월 15일 치뤄진 대통령 선거에서의 부정행위를 보다 못한 민주당 소속 도의원·당간부·당원은 당일 오후 당사 앞에 모여든 군중과 함께 선거무효를 선언하면서 제1차 마산의거가 일어났다. 이 의거로 9명이 사망하고 80여명이 부상당했다. 그 중 김주열은 오른쪽 눈에 경찰이 쏜 최루탄이 박혀 사망했는데, 실종처리된 그의 시신이 약 1달 뒤인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떠오르면서 제2차 마산의거가 일어났다. 이는 4.19 항쟁과 4.26 교수단 시위를 거치면서 이승만의 하야로 연결되었으니, 결국 마산에서 시작된 3.15 의거는 이승만 독재정권 붕괴의 도화선이 된 것이다. 이전 글 <불심과 흥청이 거쳐간 공간, 탑골공원>에서 4월 26일 오전에 시민들이 파고다공원 안으로 들어가 이승만 동상을 끌어 내려 부수게 되고,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선언을 했다고 언급했었다. 당시 민주당 당사는 불종거리에 있었는데, 불종은 일제강점기에 화재·위급 발생시에 종을 쳐서 시민들에게 알리는 수단으로 마산 동성동(전 희다방 앞)에 설치되었었다. 이 불종은 일제강점기 말에 도로 확장에 따라 철거되었고, 이 일대 약 300미터의 도로는 불종거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20여년이 지난 1979년 10월 18일, 또 다시 마산에서는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시위이 일어났다. 부산의 시위소식을 접한 경남대생을 필두로 노동자와 고교생들까지 참여한 마산시위는 부산보다 공격적이었다고 하는데, 경찰의 강경진압에도 굴하지 않고 양덕동 공화당사와 관공서, 파출소를 공격했다. 다음 날인 10월 19일 마산·창원지역에 위수령이 발동되면서, 이틀만에 민중의 비조직적 참여로 이뤄진 시위는 진압되었다. 그 당시 정부의 폭력적 진압을 생각하면, 현재 우리는 얼마나 평화롭고 민주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 감사하게 된다. 다만 민주의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게 적용되면서, 그로 인한 왜곡도 만만치 않다고 느껴진다. 마산시위가 진압되고 일주일이 지난 10월 26일 박정희가 피살되었다.
전성기와 쇠퇴, 산업도시
마산이 성장하는 결정적인 계기는 1960년대 후반부터 생겨났는데, 수출자유지역과 한일합섬섬유공업(한일합섬), 한국철강 등 산업시설과 기업들이 들어오면서 일자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도시는 확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젊은 노동자들로 인해 소비계층이 젊어졌다. 증가한 인구들이 거주하기 위해 신시가지(동마산, 양덕동)와 도로가 조성되었고, 마산의 도심(창동 일대)의 중심상권이 팽창·분화되면서 신마산·합성동에 부도심이 형성되었다. 이 당시 마산사람들은 창동을 '시내'라고 불렀는데, 주말만 되면 시내와 부도심은 사람들로 가득 차서 통행이 어려울 정도였다. 이전 글 <일제가 들여온 주전부리, 빵집>에서 언급한 창동 고려당도 시내로 외출나온 마산사람들이 즐겨 찾는 장소였다.
1967년 한일합섬은 양덕동에 마산공장을 건설하였는데, 당시 최고의 섬유기술과 생산력을 자랑하며 한때 마산을 전국 7대 도시로 이끈 주역이었다. 1974년 국내기업으로서는 최초로 종업원을 위한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현 한일여자고등학교)를 공장부지 옆에 개교하기도 했었다.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위기로 부도를 맞이한 후, 2007년 동양그룹에 이어 2016년 유진그룹으로 인수되었다. 한일합섬 공장부지에는 2008년 3·15아트센터, 2009년 메트로시티 1차, 2015년 메트로시티 2차 아파트가 차례로 들어서면서 고층의 랜드마크이자 고급 주거지로 변모했다. 한일합섬은 설립 이후 근 20년 가까이 지역경제 성장의 동력이었던 만큼, 한일합섬의 쇠퇴가 아쉽게 다가오는 부분이다.
어릴 적 마산에서 시내버스를 타면 자주 경유하는 정류소가 있었는데, 봉암동과 양덕동 경계에 위치한 '수출후문'이었다. 여기서 '수출'이라고 함은 수출자유지역을 의미하는데, 그 만큼 당시 출퇴근하는 유동인구가 많았었다. 마산수출자유지역(현 마산자유무역지역)은 1973년 봉암갯벌에 완공된 총 2개 공구의 국가산업단지로, 국내 최초의 외국인 전용공단이었다. 1980년 이후 수출의 안정적인 증가와 함께 기술집약형 업종들로 기업들이 대체되면서 성숙기에 맞았으나, 1980년대 말부터 민주화로 인한 노사분규의 여파로 침체기를 겪기도 했다. 1994년 이후에는 업종구조가 전기·전자 위주로 고도화되었고, 2000년 제3공구가 준공되었다. 현재 전국의 자유무역지역은 산업단지형 7개, 항만형 5개, 공항형 1개(인천공항) 등 총 13개가 운영 중인데, 산업단지형은 마산, 군산, 대불, 동해, 율촌, 울산, 김제가 있으며, 항만형은 부산항, 포항항, 평택·당진항, 광양항, 인천항이 있다. 7개 산업단지형 자유무역지역 중에서 마산자유무역지역이 공장가동율, 수출액, 생산액 및 고용인원이 가장 많기는 하나, 근 50년 동안 가동된 만큼 수출액과 고용인원이 계속 줄어드는 추세이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1980년대에 삼촌을 따라 엔화를 교환하러 갈 때, 가야백화점 옆 수출자유지역교를 건너 위치한 외환은행을 방문한 기억이 있다. 당시 수출자유지역 내의 그 외환은행이 유일한 마산지점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린 마음에 상당히 이국적인 경험이라는 느낌을 받았었다.
양지 바르고 덕이 많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양덕동은 팔룡산의 서쪽에 위치한 행정구역이다. 팔룡산 바로 아래에 있는 양덕국민학교는 봄·가을 소풍을 주로 팔룡산으로 다녔던 기억이 있다. 떠올려 보면 40년 전에도 양덕동은 주거지 구획이 상당히 잘 된 느낌이었는데, 이는 인근 한일합섬과 마산수출자유지역의 배후주거단지 조성을 위해 토지구획정리사업을 시행했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이후 주거단지 양덕동은 부도심 합성동과 함께 개발되었는데, 이전까지 양덕동은 벼농사가 성행했던 곡창지대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희미한 기억에는 양덕동의 주택에서 셋방살이를 하는 어린 여공들이 많았던 것 같다. 한국은 1960~1970년대 고속·압축성장기를 영위하면서 사회이면에는 많은 문제점을 남기게 된다. 이러한 문제점에는 재벌 위주의 불균형한 기업구조, 경제성장 최우선 정책에 따른 정치·사회 미성숙, 빈부격차, 인구과밀화로 인한 급격한 도시화, 농촌인력 부족, 환경오염 등이 있는데, 마산·창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더 심각했던 것 같다. 지금도 창원은 노동정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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